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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나날, 기록

허리통 (18.09.06)

by GrapeVine.Kim 2020. 2. 20.

얼마 전부터 허리에서 묵직함이 느껴졌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생업은 나의 준비됨을 기다리지 않기에, 불편함을 무릎 쓰고 일어나 일상적인 생활을 했다. 몸을 쓰고 움직이면서 등에서 느껴진 묵직함은 날카로움으로 바뀌었다. 약간만 몸을 움직여도 분명 숨을 쉬고 피가 도는 나의 육체 내에서 낙뢰가 치는 듯했다. 아프다고 말했다. 나의 아내와 동료들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위로의 말도 전해왔다. 말과 눈 빛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다정함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노동을, 노동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을 줄여주지는 못했다. 산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지 하고 스스로 되뇌어 보았다.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움'이 피어 올랐다. 왜였을까. 그 감정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결국 내게 느껴지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삶을 얼마나 비루하게 만드는지 아는 것은 '나' 밖에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타인에게 아무리 잘 전달하고 싶어 이야기를 해보아도 타인이 내가 느끼는 것의 모든 것을 온전히 경험할 수는 없다. 타인이 공감할 수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일 수 밖에 없다.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 혼자 이겨내야 하는 것. 그것이 외로움의 이유는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자기 연민에 빠지진 않았다. 그 말은 곧 나 또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략 짐작은 갈 때가 있지만, 그래서 함께 슬플 때도 있지만, 내가 느끼는 슬픔이나 괴로움은 나의 것일 뿐,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알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그 인생이 그에게 부여하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삶을 견디는데 필요한 그의 의지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앞에서 웃고 있는 누군가가 겪고 있을 삶의 무게를 얼마나 가볍게 보아왔던가. 위로랍시고 던진 조언에도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얼마나 아쉬워했는가. 빨리 변하지 않는 누군가의 모습에 다급하게 닦달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나도 타인의 고통을 모두 다 알지 못하기에, 나의 모든 것이 이해 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타인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공감해주지 못한다고 느껴서 서운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화가 났고, 그래서 미웠다. 그러나 결국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처한 현실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나의 괴로움을 다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나는 다 알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을 타인을 그런대로 존중하고 수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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