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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나날, 기록

삭개오와 친구가 되고 싶은가 (18.10.09)

by GrapeVine.Kim 2020. 2. 20.

삭개오와 친구가 되고 싶은가

자신의 업적을 과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고서야, 무의식적으로 무가치할 것 같은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박적으로 청결을 강조하며 씻은 몸을 씻고, 또 씻어내는 사람들은 청소나 목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죄책감, 스스로를 더럽다고 여기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이야기는 많다. 어떤 일에 과도하게 흥분하고 있을 경우, 그 사람은 객관적으로 일어난 일 이상으로 무언가 사연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했던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자가 타인의 치부를 확대해낸다. 흰색도 더 흰 색 옆에서는 누렇게 보이듯, 더큰 치부가 그냥 치부를 감춰버린다. 아이고 지겹다. 우리네 정치판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자주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난 뭘 이야기하고 싶은건가. 그러게나 말이다.

한 마을에서 살인자가 나왔다. 피해자의 유족에게 사람들은 위로를 건냈고, 빈소를 찾았다. 반면 살인자에게 돌을 던지며 침을 뱉었다. 집 담벼락에 살인자라는 붉은 글씨를 새기고, 어디에 나타나던지 폭력을 일삼았다. 그런데 사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은 피해자를 싫어했다. 평소에 피해자를 따돌렸고, 괴롭혔는데, 살인자도 그 괴롭힌 무리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살인자를 손가락질하며 생각했다. 우리가 저런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예수는 창녀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막지 않았고, 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불렀다. 사람들은 저자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고 죄인의 친구가 된다고 욕했지만, 어디 그가 나는 죄인이 아니오라고 말했던가.

요즘 인터넷에는 이런 글이 많다. 저런 놈은 잡아서 족쳐야돼. 저런 놈은 평생 썩게 만들어야 돼. 뭐 10년형? 만 이천년은 빛도 못보게 해야돼. 다시 갱생시킨다고? 사형시켜라. 사형. 눈깔을 뽑아버려. 사지를 잘라버려. 혀를 뽑아라...이 안에서 구별되는 내용은 없다. 똑같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하셨던 예수는, 우는 자와 함께 하였고, 죄인을 찾으러도 다니셨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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