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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18 묵상노트 / 로마서 12:17-21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어젯 밤, 아내와 함께 동네 길을 걸었다.


“속으로 참을 줄만 알았던 나는 당신에게서 표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반대로 당신은 참고 인내하고 받아주는 것을 배우고 있나요?”


오늘은 한 동네에 사는 미선 이모를 카페에서 만났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니. 품어주는 것이지. 그렇게 지내다보면, 그 사람의 좋은 장점들이 보인단다. 장점들이 더 많이 보이면, 상대의 단점 따위는 가리워지지.”


갑작스럽게 나에게로 다가오는 말들이 비슷한 맥락을 가진 것 처럼 보였다. 비슷한 말들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리니, 나에게 필요했던 이야기구나 싶었다. 나는 주장할 뿐, 참아주지는 못했던가. 사람 사는 사이에서 부딪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도 필요했던 것이었나보다.

내 주변에 원수라 부를 이가 있었던가. 사실은 친구, 가족, 형제와 자매가 아니었겠는가.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내 형제와 자매는 어찌 대해야하겠는가.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에 반성을 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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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rapeVine.Kim

170627 묵상
빌립보서 3:1-11

1. 끝으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 나에게는 번거롭지도 않고, 여러분에게는 안전합니다.
2.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3.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4. 하기야, 나는 육신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우리의, 나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일까. 삶을 바라보는 시선, 삶을 읽어내는 해석, 삶을 살아가는 방법...신앙이란 그렇게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삶은 무엇으로 향하는가. 세상은 생존을, 힘을, 즐거움을, 우위를 추구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칭송받고 아름답다 칭해지는 것이다. 또한 폄하되고 누추하다 칭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판단할 때, 자신의 삶을 판단할 때 그러한 세상의 시선, 해석, 방법을 이용하여 구분한다.

바울은 자신이야말로 당시 유대인 가운데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세상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그것을 자신에게 있어 오물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기준의 반전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의 기준은 거기서 가치의 전환을 맞이하고 그리스도를 쫓는 자는 그리스도의 인정을, 그리스도의 기쁨을, 그리스도를 따라감을 그 자리에 둔다. 삶에서 신앙은 응당 그러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

나를 바라볼 때 보잘 것 없는 나의 모습에 실망하고 괴로울 때가 있다. 이런 평가 잣대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그 안에 내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쫒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은 한켠으로 밀려난다. 그리스도 신앙이 삶이 무엇이어야하는지 말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신앙을 버리던지, 허상을 버리던지 나는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고, 고난에 용기있게 참여하고,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 결국 부활에 이르는 길임을, 우리가 칭송하고 바라봐야 하는 삶임을 마음 속에 새길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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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rapeVine.Kim

170530 묵상노트

디모데전서 6:3~10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이미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병이 든 사람입니다. 그런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 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시대이다. 자본주의의 시대에서 자본주의자로 살지 않고자 노력할 수는 있으나, 그 누구도 자본주의로부터 떠나서 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물질에 대한 신앙관이 흔들릴 일이 별로 없었다.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이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이었고, 부자는 편하게 생활할 수는 있었지만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말을 듣기 어려웠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자본가가 세상을 유익하게 하리라는 주장을 편 이후로 자본에 대한 인식은 바뀌게 되었다. 열성적인 자본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길이었다.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점점 신앙 속에서도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바꿔가고 있다. 부자가 되어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훌륭한 신앙인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돈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돈에 대해 가치적 혼란을 겪게 된다. 성경에서는 부자를 부도덕하게 그린 부분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교회 내에서 부자들은 좋은 인상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한가지 미덕이 되었으므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싶기도 한다.

돈이 없으면 이 시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자연이 주는 소작물로 생계를 이어갔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당장의 점심 한 끼 조차도 우리는 돈으로 구매를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돈은 곧 생명으로 이어진다.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괴롭고 힘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도 돈은 필요하다. 돈으로 악을 행할수도 있지만, 돈으로 선을 행할 수도 있다. 돈을 버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아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좋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돈을 버냐, 벌지 않느냐가 아니다. 돈을 벌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없는 세상이다(돈을 벌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하기 위해 살 것인가이다. 교회를 다니며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하면 부도덕한 것일까 고민이 든다면, 나는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중요한 지점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되는 것 같다. 요점을 가리는 표면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돕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타인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타인을 고통에 빠트리는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우리는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세상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 돈이란 수단이 우리 인생 속에서 수단으로써의 지위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단순히 경제활동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도덕적이고 선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악하고 부도덕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수단을 우리 삶의 목적으로 두는 순간 그 것은 악으로 돌변한다. 특히, 신앙인으로써 우리의 삶을 거짓의 삶으로 만든다.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 속에서 타인의 삶을 파괴한다. 이미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고 여기 저기에서 십자가를 내건 교회를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 성별 임금 격차의 문제, 살인적 노동시간의 문제, 빈부격차, 산업재해 등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괴롭고 실망적이다. 왜 기독인들은 거기에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삶과 가족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할 때 같이 울어주지 않을까. 왜 그들을 짓밟는데 앞장서고 있을까.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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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rapeVine.Kim

170526 묵상노트
디모데전서 5:1~8

나이가 많은 이를 나무라지 말고, 아버지를 대하듯이 권면하십시오. 젋은 남자는 형제를 대하듯이 권면하십시오. 나이가 많은 여자는 어머니를 대하듯이 권면하고, 젊은 여자는 자매를 대하듯이, 오로지 순결한 마음으로 권면하십시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십시오. 어떤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네 가족에게 종교상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참 과부로서 의지할 데가 없는 이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 향락에 빠져서 사는 과부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것을 명령하여, 그들이 비난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지체를 대함에 있어서 가족을 대함과 같이 대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공동체를 서로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가족인 것이다. 아버지를 공경하듯, 어머니를 존중하듯, 형제와 자매에게 애정을 갖듯 공동체의 구성원을 대하도록 요구되는 우리는, 말 그대로 서로 가족이 되도록 노력해야한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은 가장 기본적으로 서로 보호한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할 때 타인에게는 도움을 줄 의무가 없지만 가족에게는 그를 보살필 의무가 주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의 지체가 된 우리는 가족에게 요구되듯이 서로를 향한 보호와 책임을 질 의무가 생긴다. 그러나 이는 기계적이고 율법적인 보호와 책임은 아니다. 제대로 된 가족은 서로를 향한 애정과 연민을 품는다. 정서적으로 차단된 가족은 혈연 관계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 보기 어려울 때가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책임과 보호, 그리고 유대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가족이 되어간다.

나는 지금 소속된 교회에서 ‘가족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서로 가족이 되기 위한 선언적 의미를 담아 공동체의 지체들은 모임의 이름을 ‘가족’이라고 붙였다. 나와 너를 가족이라고 서로 정의한 순간 우리는 서로를 향한 보호와 책임의 의무, 그리고 정서적 유대감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시대의 깨어진 수많은 가정들과 같이 우리의 가족 관계도 금방 깨질 것이다. 서로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형제와 자매처럼 대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노력해야할까.

애석하게도 내가 소속된 가족모임은 아직은 서로 어색하고 어떻게 책임져야하는지, 책임지고자 하는지 확신이 없는 상태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 조심하고자 하지만 걱정이 되긴한다. 애초에 가족이 서로 가족처럼 되어가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같이 밥을 먹고,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알고, 때론 투정을 받아주면 되는 것일까. 이런 것은 물론 도움이 된다. 서로를 향해 더 애정을 갖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언제 서로의 갈 길을 가게될지 모르지만 지금을 함께하는 ‘동행자 혹은 친구’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가 된 ‘가족’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때론 서로에게 이유가 없을 때가 있다. 왜?라는 질문에 ‘가족’이 대답이 될 때가 있다. 서로를 왜 책임지는지, 서로를 왜 사랑하는지 그 이유가 없이 ‘가족’이라는 대답으로 모든 이유가 충족되기도 한다. 서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간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였는지로 도움을 결정할 필요 없이 ‘가족’이라는 대답으로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가족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가족이기에 서로를 돌본다. 가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자 족쇄일까. 어찌되었든 바울은 우리에게 가족을 돌보라고 말한다.

교회에서 지내는데 있어서 어려울 때가 많다. 주로 관계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이 생긴다. 미운 사람도 있고, 불편한 사람도 있고, 안 맞는 사람도 있고, 아쉬운 사람도 있다. 물론 함께해서 즐겁고 행복할 때도 있다. 사람 관계가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가족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런 관계는 우리가 서로를 책임지고 돌보는데 있어서 그 근거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는 바울의 말은 무서운 말이다. 가족 모임을 함에 있어서 내가 책임지고 돌볼 필요가 있는 사람은 없는지 주의를 기울이고, 나의 것을 내어주기를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이 말씀은 내게 너무나 큰 고통이자 가시로 느껴진다. 교회를 공동체로, 또 가족으로 여기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향한 기대감과 일치되어 마음 속에서 하나의 다짐이 된다. 그러나 나의 혈연 가족들을 향한 책임과 돌봄의 말씀은 내게 괴로움이자 회피하고 싶은 말씀이다. 어릴 적부터 가족들을 향한 분노와 절망, 상처로 관계의 벽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알콜 중독과 폭언, 폭력, 과도한 기대와 요구, 무관심, 무책임 등으로 기억되는 나의 아버지를 나는 아직도 용서를 하지 못한다. 못하겠다. 머리와 마음이 분리되는 용서의 기로에서 나는 나의 작음과 못남에 무릎 꿇고 비통해한다. 나는 지금 아버지가 어디에서 사는지 모른다. 알려면 알 수 있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혼자서 생활을 할 수 없는 건강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까봐 두렵다. 그 땐,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돌보아야 하지만 내가 과연 돌볼 수 있을까. 매일 그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나는 상상 속에서조차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나의 신앙이 진실인지를 확인할 수 있게하는 문제가 될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 신앙을 알도록 준비해놓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나의 아버지를 도울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 나는 공동체 지체를 더 쉽게 품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는 이렇게 나의 부끄러운 삶의 조각을 잠시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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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rapeVine.Kim

170518 묵상노트

디모데전서 1:1~11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 된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쓸데없는 토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건전한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선포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처럼 변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이 위와 같은 문장으로도 명쾌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하는가. 안타깝게도 사랑하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들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우리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수단에 대해 서로 논쟁하며 왈가왈부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사랑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와중에, 서로 다른 방법을 발견한 나머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때론 자신만의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다가 싸움이 발생하기도 한다. 바울은 이 것을 두고 쓸데없는 변론이라고 일갈한다. 사랑하고자 미워하는 꼴이다. 목적전치다.

그러나 나는 서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논쟁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사랑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갈지 논쟁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우리의 삶은 구체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삶의 형태가 다양하듯, 답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답을 찾는 방법 조차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현대 개신교는 율법주의를 매우 부정적으로 여긴다. 그런 와중에도 고정되고 정형화된 신앙의 모습을 만들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앞에서 비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라는 거야? 신앙이 아니라는 거야?”, “믿음으로 인한 신앙이라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며 나는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려는 시도로부터 숨었던 것 같다. “정해진 방법은 없어라고 이야기함은 곧 내 행동의 옳고 그름, 혹은 정당과 부당함을 판단할 기준을 없애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내 행동에 대해 무엇으로 사랑인가 아닌가를 고민할 것인가. 나는 이미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음을 내 양심은 안다.

 나는 말씀 앞에서 내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해,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고 있는지 하지 않는지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타인에 대해 비난하고 타인을 구분 짓는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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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17 묵상노트

갈라디아서 6:11-18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습니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우리는 때때로 예수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구원의 증거를 삼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과 지키지 않는 것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하는데, 2000년이 지난 우리의 시대에도 율법주의자와 같이 행동하며 율법을 지키기를 강요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주의자만을 경계하면 되는 것일까? 바울은 율법주의만을 경계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즉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울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바울이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말 그대로 예수가 아닌 모든 것은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말씀을 보면서 나는 종종 예수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로부터 구원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내가 잘 살고 있음을, 내가 의미 있는 길을 걷고 있음을 확신하게 하고, 내 영혼이 평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 무엇이지 않을까. 세상이 우리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끼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돈과 명예, 안정된 직장, 건강 등이 있다. 나는 돈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았을까. 명예를 쫓고자 하지 않았을가.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하여 두려워하지는 않았는가. 건강을 잃어버릴까봐 불안하지는 않았는가. 마치 그것이 내게 구원이 되듯, 그것을 바라고 원하는 마음 속 깊은 곳의 열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보다 크지는 않았는가 생각해보면, 오직 예수만을 위해 세상을 버린 바울의 결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바울과 같이 되기에는 아직 너무 부족한 나이지만, 내게 없는 세상의 부와 명예로 인하여 불행함을 느끼려고 하기보다,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구원받음의 기쁨을 품고 살아가는 내가 되어보기를, 그래서 바울이 말한 평화와 자비로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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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11 묵상노트

갈라디아서 4:8~20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시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주었습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떠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을만하던가, 용서 받을만하던가 해서가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셨던 것으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나의 구원의 문제에 해당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타인을 바라보면서도 적용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나는 자격 없지만 그분으로 인하여 자격을 얻고 용서를 받았다. 그리고 불완전한 공동체의 형제 자매 또한 자격 없음에도 용서 받았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 공동체 안에서 관계로 어려움이 느껴질 때가 많고, 때로는 그들의 부족함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의 어떠함이 그 또는 그녀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이다. 우리 모두는 자격 없음에도 이미 한 몸이 되었고,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자들이 되었다. 이 사실을 기억함으로 누군가를 대함에 있어서 조금 더 따뜻하고 포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물론 스스로를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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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22 묵상노트

 

요한복음 13:1-11

 

( 13:1, 새번역)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 13:2, 새번역) 저녁을 먹을 때에, 악마가 이미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 13:3, 새번역)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 13:4, 새번역)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 13:5, 새번역)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 13:6, 새번역)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다. 이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 13:7, 새번역)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 13:8, 새번역) 베드로가 다시 예수께 말하였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 13:9, 새번역)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내 발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

( 13:10, 새번역)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발 밖에는'이 없음

( 13:11, 새번역) 예수께서는 자기를 팔아 넘길 사람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회사에서 청소는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나 연차가 적은 사람들이 맡을 때가 많다. 청소뿐이랴. 잡다한 일들은 아랫사람이 하게 되곤 한다. 윗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부하직원을 보고 심드렁하게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하고 눈치를 주기도 한다. 애초에 무엇이 사람을 윗 사람과 아랫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들은 상식적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지위가 있는 사람은 편하게, 지위가 낮은 사람은 힘들게. 군대를 다녀오고서도 이런 것을 모르면 손가락질 받기 일수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우리는 점점 올라가려고만 한다. 지위가 낮으면 힘들고, 지위가 올라가면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좋은 환경과, 더 많은 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 위에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인 욕망이다. 그 욕망이 과하여 주체할 수 없게 되면 불법을 저지르고서라도 위로 올라가려고 한다. 그리고 교회도 이런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죽는 것을 알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었다. 발을 씻기는 것은 당시 하인이 하던 일이었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발을 씻길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는 제자를 사랑하였고, 그래서 그들의 발을 씻기었다. 예수는 제자들을 위한 미천한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렇게 사랑하는 것을 보이셨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사랑하라고 이야기하셨다.


 한국 사회에서 살다보니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거나 지위를 나누어서 사람을 판단하는 것 같은 인식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 같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갈 수록 존중 받기 위함이 아닌, 타인을 섬기고자 했던 예수의 모습과 가르침을 기억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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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34-43


34    그 때에 무리가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인자가 누구입니까?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다녀라.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36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어서, 빛의 자녀가 되어라.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서 몸을 숨기셨다.
37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징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
38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한 말이 이루어졌다. 주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님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39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까닭을, 이사야가 또 이렇게 말하였다.
40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예수를 가리켜서 한 것이다.
42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43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예수는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빛이 없는 이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로 인하여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쫓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당혹스러워하였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 것인데 어찌하여 들려야한다는 것인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들린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모든 권력을 굴복 시킬 왕과 패배자가 치루어야할 결과인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서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승리하는 예수를 기대하였지만, 실망하였고 결국 예수를 믿지 않고 떠났다.


예수는 이후 고난과 고통의 길을 걷는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모욕을 당하며 해골의 언덕으로 올라간다. 해골의 언덕에서 그는 자신을 어찌하여 버리는지 자신의 아버지에게 절규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 절규 속에 어떤 고통이 있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의 길은 그렇게 고난과 고통의 길일 수 밖에 없다. 그가 마구간의 구유 속에 누인 순간부터 편하고 여유를 누리며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려는 생활방식은 그의 길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우리에게  너 자신을 위해 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결국 예수의 빛은 십자가의 길을 비춘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처럼 죽음에 이르러야한다. 그와 이웃을 위한 죽음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터이다.


요양한다는 핑계로 편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이 삶 속에서 그를 위한, 타인을 위한 고난과 고통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시간을 내어 촛불을 들러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공동체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잘 섬기고자 다짐해본다.


무엇보다도 혼자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 아내의 짐을 덜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내가 사회 속에서 짊어져야 하는 고난의 십자가를 다시금 보여주시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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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16 묵상노트

 

 

요한복음 11:47-57

( 11:47, 새번역)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 11:48, 새번역)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 ㉥또는 '성전'

( 11:49, 새번역)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 11:50, 새번역)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 11:51, 새번역)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 11:52, 새번역)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 11:53, 새번역)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 11:54, 새번역)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로 더 이상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에서 떠나, 광야에서 가까운 지방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가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다.

( 11:55, 새번역) 유대 사람들의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오니, 많은 사람이 자기의 몸을 성결하게 하려고,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 11:56, 새번역) 그들은 예수를 찾다가, 성전 뜰에 서서 서로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가 명절을 지키러 오지 않겠습니까?"

( 11:57, 새번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누구든지 그가 있는 곳을 알거든 알려 달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표징을 보고 그 표징이 뜻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기득권 혹은 정치 논리에 집중하였고, 예수의 표징이 그들이 추구하는 바와 달랐으므로 그 것을 없애버려야 하는 요소로 결론 내렸다. 예수가 한 일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일들이었다. 그것을 본 이들은 응당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볼 수 있으되 볼 수 없는 이들이었다.

 

 내 생각과 주관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고집하는지에 따라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기적 조차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방해물이 되곤 한다. 반대로 고집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현상과 진실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정한 목표가 참 된 목표라고 어리석고 오만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한다.

 

 삶이 괴롭다. 괴롭고 어렵다. 어렵고 슬프다. 정의로운 사회는 없고, 소수의 부를 위해서 다수가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회가 되는 것 같다. 뉴스를 살펴보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이런 생각은 우울감으로 다가온다. 세상이 변화될 것 같지 않다고 마음 한 켠에서 이미 결론이 내려진 듯, 희망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시민들, 압력 속에서도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진실을 쫓기 위해 핍박도 마다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광장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이가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모인 사람들이 있으며, 국민을 위해 소리치다 투옥된 노동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다. 그 안에서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진 않을까.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 속에서 일하시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열린 눈과 귀,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그가 살아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갈 때, 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마음을 지켜갈 수 있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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