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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나날, 기록

신뢰 (19.11.29)

by GrapeVine.Kim 2020. 2. 20.

그는 내게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란 누구를 뜻한다는 말인가. 신뢰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마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으로 인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냐는 뜻이리라. 나는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고 바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조금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의 고요가 흐르고 그는 말했다. 너도 책임질 마음이 없구나.

나는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누구든지 한 테두리에 묶였다는 것으로 온전하게 나를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타인들도 내가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삶을 짐져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동화 같이 어린 시절 믿고 있다가 깨져버린 조각으로 상처가 나면, 그 통증에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시기가 온다. 이미 그 시기를 거쳐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약속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믿음도 소망도 없이 지금만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버린 난 잠자코 그의 말을 주워서 나의 뱃속에 넣었다. 소화가 되지 않을 말은 기분을 더부룩하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토해내지 않고 살 줄 알아야 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찜찜한 기분으로 인해 잠자리가 도무지 편하지 않았다. 너도 책임질 마음이 없구나. 너도 책임질 마음이 없구나. 너도 책임질 마음이 없구나. 그에게 뭔가를 말해야만 편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고.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고. 나는, 책임지고 싶지 않은게 아니라고.

나는 하루를 보내고서야 그에게 말을 건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뭐가?

-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나는 믿었어. 믿고 싶었어. 내가 아무도 아니어도, 가족이 아니어도, 친구가 아니어도, 동료가 아니어도, 사람들이 나를 받아줄 것을. 도와줄 것을. 사랑해줄 것을. 품어줄 것을. 책임질 것을. 그런 때도 있었다고. 그래서 나도 내가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고.
기대했어. 기대하고 기다렸어. 그렇지만 그 때 내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래주지 않았어. 기대하면 할 수록 아팠어. 상처가 생기고 괴로웠어. 왜 기대하냐고. 왜 그런걸 바라느냐고. 왜 나한테 그러냐고. 질문 앞에서 대답할 수 없었어. 그리고 나도 그러지 않았어.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어. 함부로 기대하면 안된다는 것을. 아무에게나 바라면 안된다는 것을. 그건 나와 타인을 아프게 할 뿐이라는 것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결국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사실은 가족이었어도 친구였어도 동료였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을.
믿을 수 있게 된다는 건, 정말 많은 시간과 사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아무런 역사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허상이라는 것을. 서로 말로만 한 것으로는 음파처럼 금방 흩어져버려 원래 있었는지도 모르게 된다는 것을. 당신과 내가 겪어온, 서로 희생했던 것이, 흘렀다 말라버린 눈물 자국들을 보고서야 우리는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결국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는 책임지기 싫은게 아니다. 단지 충분하게 서로 나눈 사람들만 믿을 수 있다. 우리라는 말이 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함부로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일방적으로 실망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짐지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짐져달라고 요청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나를 내어주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게, 지금을 살고 있는 나의 정직한 모습이었다.

나는 꿈꾸고 싶지 않았다.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아프고 싶지 않았다.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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