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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나날, 기록

나의 부인 (20.01.03)

by GrapeVine.Kim 2020. 2. 20.

나의 부인

결혼 전, 교회에서 진행하는 독신 스터디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독신의 역사와 독신이 발생하게 된 다양한 사회적 원인들, 독신을 선택하거나 독신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겪었던 어려움 등을 같이 이야기하는 기회였다. 다 적을수는 없지만, 현재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독신에 대한 오해를 조금은 벗겨내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함부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결혼은 인생의 온전한 단계라거나 독신은 삶의 한 부분이 결여된 상태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당시 스터디에 참여한 사람들의 결론은 이 것이었다. 결혼 생활을 하던, 독신 생활을 하던지 그것은 삶의 다양한 방식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 말이다. 더 좋고 더 나쁜 것이 아닌,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일 뿐이며, 각각의 선택이 주는 유익이 있고 그에 따라 감내해야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삶의 형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얻을 수 있어서 스터디에 참여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신 모임을 통해 현재의 아내와 더 친밀해져 결혼에 이르게 되었던 것까지.

삶에는 당연히 밟아가야 하는 단계가 있을까? 나는 모두가 같은 길을 가고, 동일한 형태의 모습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 인생이란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어서 더 위대한 것이 아닐까, 여러개의 선택지가 있어서 재미있는 것은 아닐까, 각자 나름의 이유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존중받아야 하지 않은가 등의 낭만적인 생각을 해본다.

나는 결혼을 하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갖는 것도 우리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아닌지, 아이를 갖는 삶과 아이 없는 삶 모두 동등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 자체를 긍정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서로 다투며 결혼 생활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말았다. 결국 함께 살지 않는 선택을 했다. 건강하게 의견을 교환하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을 주는 부부 싸움은 아이들에게까지 상처를 준다. 방문을 닫고 불을 끄고, 두꺼운 이불 속에 들어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어른들의 고성과 욕설에 귀를 귀울이는 어린아이가 34살이 된 지금의 내 안에도 숨어있다는 것을 종종 느낄 때가 있다. 그분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면서 살았기에, 내게 가족이란 따뜻한 느낌을 주는 단어는 아니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마음 속 그 아이가 때때로 내게 함부로 부모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 하나의 인생도 감당하기가 어려운데, 새로운 인생을 탄생시키고 그것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가 느끼게 될 분노와 상처가 무서웠다. 육아를 하느라 괴롭고 지쳐가며 서로 다투게 될지도 모를 나와 미래의 아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 없는 삶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나는 아내와 결혼을 하기 전부터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가지고 싶지 않다고 말해왔었다. 나를 닮은 아이라니, 나와 같은 부모라니, 상상을 하기도 싫었다. 이렇게 괴로운 세상에서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은 존재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결혼 전의 아내는 이런 나의 생각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최근 다시 물었을 때, 아내는 당시 살아가기 힘겨운 우리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시기였고, 그에 따라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 없는 결혼 생활을 기대하며 살아왔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서로의 인생을 지지해줄 수 있는 두 사람이라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둘 뿐이기에 가볍고 자유롭게, 혹은 즐겁고 간편하게, 나이스한 삶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는 아이를 키우는 삶으로부터 더 벗어나고 싶어지게끔 했을 것이다.

어느 날, 아내는 내게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던 나는 그 말을 듣고는 한 순간에 몸이 물 속에 던져진 듯이 숨 쉬기가 답답해졌다. 우리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내는 고민이 되었던 것일 뿐, 낳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고, 아이 없는 삶과 아이 있는 삶의 선택지는 여전히 내 앞에 있었다. 아내는 결혼 생활을 하며 우리의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나와 당신을 닮은 아이를 보고 싶고, 기르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가 감당해야하는 삶의 무게를 아내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둘 만의 삶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라고, 지금부터 시작될 또 하나의 인생으로 인해 우리가 감당해야할 책임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고, 아이가 없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인생의 고통과 괴로움을 짊어지고 살아도 괜찮겠냐고. 그래도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하는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그 바람이 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지워진 줄 알았던 선택지가 다시 나타나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부모가 되는 것과 부부로써만 사는 것은 타협이 가능한 것일까. 나는 이것은 1과 0의 차이 처럼 있거나 없거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한쪽으로 결정이 난 순간 다른 한 쪽은 사라져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 우리 부부는 오랜 대화의 시간을 가졌고, 때로는 무거운 마음을 묵묵하게 견디며 서로를 기다리며 지내야 했다.

나는 무섭고 무거운, 부모라는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아이가 힘듦이기도 하지만 더 큰 행복이기도 하다고들 말했다. 그 말들 앞에서 나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니, 더 큰 행복도 그에 수반하는 고통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아이 없는 삶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 아내와 내가 그냥 편하게 살면 좋지 않은가.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내리게 되는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어느 저녁, 아내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린다고 말해주었다. 나의 괴로움도, 두려움도 알고 있기에, 기도하며 견디고 있다고. 그때까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이를 바라지만 남편의 반대로 쉽게 말하지 못했던 아내의 속 마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도 그저 기다리고 더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아내는 그 괴로움의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나의 고백은 과연 무엇을 뜻해왔던가. 어떤 삶을 약속했던 것일까. 나의 괴로움과 고통만을 볼 줄 밖에 몰랐던 나는, 내 뒤에서 울고 있었을 아내를 오랜 기간 내버려두고 있었을 뿐인데.

나는 아내를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모가 되는 삶을 선택하겠노라고, 무섭지만 함께 이겨내보자고 이야기 했다.

머릿속으로 하나의 문장이 떠오른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겨낸다. 사랑이 나를 변화시킨다. 나의 선택을 기다려준 아내가, 자신을 부인해왔던 아내가 결국 나로하여금 스스로를 부인하는 선택을 하도록 해주었다. 부모가 되겠다는 다짐은 내게 여전히 두려움과 떨림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아마도 이 선택을 한 내 모습은 이전의 나와는 조금 다른, 나보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를 내어던지는, 내가 조금 더 성장한 모습일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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