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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울타리를 넘어, 리뷰

이해와 포용, 그 한계에 관하여-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을 읽고(20.01.30)

by GrapeVine.Kim 2020. 2. 20.

이해와 포용, 그 한계에 관하여
-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을 읽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은 없다. 독일의 한나 아렌트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워낙 유명한 이름이기에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이히만, 나치당의 고위급 간부였던 그는 유대인 수용소를 관리하며 유대인 학살이 착실히 진행되도록 운영했다. 그는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1960년까지 다른 이름으로 살던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납치되어 1961년 예루살렘에서 공개재판을 받았다.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는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은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판단했고 악은 평범하다는 자신의 철학을 책으로 출판한다. 아이히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처분이 과연 적법하고 적절했는지, 한나 아렌트의 판단과 철학은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많은 논쟁과 해석이 있지만, 나도 깊이까지 알지는 못한다.

장강명 작가의 단편집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중 일부분인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잠시 혼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히만이 내가 알고 있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그 아이히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인지. 소설 초반부터 1961년에 재판을 진행한 아이히만과 유대인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드러남으로써 의문이 들었다. 왜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인가.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만, 역시나 허구의 이야기임을 확실히 하고자 했던 것일까. 한나 아렌트의 이름도 등장하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도 등장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는 조금 다른, 유대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하며 지내는 또 하나의 세상의 이야기인 것이다. 작품은 재판 후 8년이 지나 알래스카 유대인 자치구에 초대된 한 기자의 이야기로 진행이 된다. 기자는 유대인도 아니었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는 관계되지 않았기에 담담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를 전달받는 우리도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에서 사건을 관찰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일까.

우리 세상과 이 세상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체험 기계'의 존재일 것이다. 소설 속에는 디그렘 세포라는, 인간의 기억과 정서 등이 저장되는 세포의 발견으로 인간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된다. 디그렘 세포를 이용해 타인의 체험을 전달 받을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된다. 이 과정에서 아인슈타인과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핵의 발명보다 체험 기계의 발명이 인류에게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 우리 사회에서 싸움과 차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이 의견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이해'와 '공감'이 불러올 인간의 변화와 비슷할 것이다.

작품 속 아이히만은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행했던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정하면서도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며 죄책감을 느끼지는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대인들은 그의 태도에 분노를 느꼈고,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유대인 수용소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고 가까스로 살아난 유대인 벤야민의 경험을 체험기계를 통해 전달받을 수 있도록 공개 실험을 실시한다. 아이히만은 실험에 조건을 걸었는데 그것은 벤야민 또한 자신의 경험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실험은 성공했고, 기계에서 나온 아이히만은 오열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사람들은 벤야민의 행동이 어떨지 지켜봤고, 아이히만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던 벤야민은 그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줬다. 이 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바였을까. 우리는 이해함으로써 서로를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장강명 작가는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벤야민은 아이히만을 찾아갔다. 그리고 칼을 꺼내 아이히만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죽음의 순간 메모를 남긴다. "타인은 타인인 채로 남아 있는 게 좋다". 기자는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추측, 단체와 국가가 연결된 음모와 술수에 대해 남긴다. (이것은 소설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인간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조금이라도 같이 해볼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복잡했다. 이해와 포용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시대가 이해와 포용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어떠하든 이해와 포용의 가치를 내세우지 않는 메시지는 힘을 잃는 시대가 아닐까. 그로인해 기대하는 결과는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과연, 인간은 그것이 가능할까.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그것은 자신과 구별되는 무엇과의 부정을 통해서 일 것이다. 부정되는 존재가 존재해야만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른 타인이 있어서 내가 있다. 그런데 다른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부정하던 것들을 타인의 시선에서 긍정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정말 '나'일까.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나, 다른 정체성의 나일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조금 변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알 것이다. 인생이 통째로 바뀔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충격인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과연 얼마나 큰 변화와 충격을 가져올까. 소설 속 벤야민은 자신의 변화를 견딜 수 없어 목숨을 끊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완벽한 이해를 인간이 견딜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한한 경제 발전 신화와 끝 없이 성장할 문명에 대한 기대, 모든 질병의 정복과 죽지 않는 삶, 유토피아 건설 같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꿈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가 어떤 선에서 인정하고 포기해야하는 부분인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을 다음의 문장을 통해 마무리한다. '종종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그 지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있음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위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싸울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인간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