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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30 묵상노트

디모데전서 6:3~10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이미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병이 든 사람입니다. 그런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 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시대이다. 자본주의의 시대에서 자본주의자로 살지 않고자 노력할 수는 있으나, 그 누구도 자본주의로부터 떠나서 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물질에 대한 신앙관이 흔들릴 일이 별로 없었다.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이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이었고, 부자는 편하게 생활할 수는 있었지만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말을 듣기 어려웠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자본가가 세상을 유익하게 하리라는 주장을 편 이후로 자본에 대한 인식은 바뀌게 되었다. 열성적인 자본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길이었다.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점점 신앙 속에서도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바꿔가고 있다. 부자가 되어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훌륭한 신앙인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돈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돈에 대해 가치적 혼란을 겪게 된다. 성경에서는 부자를 부도덕하게 그린 부분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교회 내에서 부자들은 좋은 인상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한가지 미덕이 되었으므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싶기도 한다.

돈이 없으면 이 시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자연이 주는 소작물로 생계를 이어갔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당장의 점심 한 끼 조차도 우리는 돈으로 구매를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돈은 곧 생명으로 이어진다.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괴롭고 힘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도 돈은 필요하다. 돈으로 악을 행할수도 있지만, 돈으로 선을 행할 수도 있다. 돈을 버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아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좋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돈을 버냐, 벌지 않느냐가 아니다. 돈을 벌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없는 세상이다(돈을 벌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하기 위해 살 것인가이다. 교회를 다니며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하면 부도덕한 것일까 고민이 든다면, 나는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중요한 지점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되는 것 같다. 요점을 가리는 표면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돕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타인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타인을 고통에 빠트리는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우리는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세상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 돈이란 수단이 우리 인생 속에서 수단으로써의 지위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단순히 경제활동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도덕적이고 선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악하고 부도덕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수단을 우리 삶의 목적으로 두는 순간 그 것은 악으로 돌변한다. 특히, 신앙인으로써 우리의 삶을 거짓의 삶으로 만든다.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 속에서 타인의 삶을 파괴한다. 이미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고 여기 저기에서 십자가를 내건 교회를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 성별 임금 격차의 문제, 살인적 노동시간의 문제, 빈부격차, 산업재해 등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괴롭고 실망적이다. 왜 기독인들은 거기에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삶과 가족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할 때 같이 울어주지 않을까. 왜 그들을 짓밟는데 앞장서고 있을까.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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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rapeVine.Kim

170526 묵상노트
디모데전서 5:1~8

나이가 많은 이를 나무라지 말고, 아버지를 대하듯이 권면하십시오. 젋은 남자는 형제를 대하듯이 권면하십시오. 나이가 많은 여자는 어머니를 대하듯이 권면하고, 젊은 여자는 자매를 대하듯이, 오로지 순결한 마음으로 권면하십시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십시오. 어떤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네 가족에게 종교상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참 과부로서 의지할 데가 없는 이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 향락에 빠져서 사는 과부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것을 명령하여, 그들이 비난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지체를 대함에 있어서 가족을 대함과 같이 대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공동체를 서로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가족인 것이다. 아버지를 공경하듯, 어머니를 존중하듯, 형제와 자매에게 애정을 갖듯 공동체의 구성원을 대하도록 요구되는 우리는, 말 그대로 서로 가족이 되도록 노력해야한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은 가장 기본적으로 서로 보호한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할 때 타인에게는 도움을 줄 의무가 없지만 가족에게는 그를 보살필 의무가 주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의 지체가 된 우리는 가족에게 요구되듯이 서로를 향한 보호와 책임을 질 의무가 생긴다. 그러나 이는 기계적이고 율법적인 보호와 책임은 아니다. 제대로 된 가족은 서로를 향한 애정과 연민을 품는다. 정서적으로 차단된 가족은 혈연 관계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 보기 어려울 때가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책임과 보호, 그리고 유대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가족이 되어간다.

나는 지금 소속된 교회에서 ‘가족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서로 가족이 되기 위한 선언적 의미를 담아 공동체의 지체들은 모임의 이름을 ‘가족’이라고 붙였다. 나와 너를 가족이라고 서로 정의한 순간 우리는 서로를 향한 보호와 책임의 의무, 그리고 정서적 유대감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시대의 깨어진 수많은 가정들과 같이 우리의 가족 관계도 금방 깨질 것이다. 서로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형제와 자매처럼 대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노력해야할까.

애석하게도 내가 소속된 가족모임은 아직은 서로 어색하고 어떻게 책임져야하는지, 책임지고자 하는지 확신이 없는 상태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 조심하고자 하지만 걱정이 되긴한다. 애초에 가족이 서로 가족처럼 되어가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같이 밥을 먹고,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알고, 때론 투정을 받아주면 되는 것일까. 이런 것은 물론 도움이 된다. 서로를 향해 더 애정을 갖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언제 서로의 갈 길을 가게될지 모르지만 지금을 함께하는 ‘동행자 혹은 친구’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가 된 ‘가족’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때론 서로에게 이유가 없을 때가 있다. 왜?라는 질문에 ‘가족’이 대답이 될 때가 있다. 서로를 왜 책임지는지, 서로를 왜 사랑하는지 그 이유가 없이 ‘가족’이라는 대답으로 모든 이유가 충족되기도 한다. 서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간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였는지로 도움을 결정할 필요 없이 ‘가족’이라는 대답으로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가족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가족이기에 서로를 돌본다. 가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자 족쇄일까. 어찌되었든 바울은 우리에게 가족을 돌보라고 말한다.

교회에서 지내는데 있어서 어려울 때가 많다. 주로 관계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이 생긴다. 미운 사람도 있고, 불편한 사람도 있고, 안 맞는 사람도 있고, 아쉬운 사람도 있다. 물론 함께해서 즐겁고 행복할 때도 있다. 사람 관계가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가족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런 관계는 우리가 서로를 책임지고 돌보는데 있어서 그 근거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는 바울의 말은 무서운 말이다. 가족 모임을 함에 있어서 내가 책임지고 돌볼 필요가 있는 사람은 없는지 주의를 기울이고, 나의 것을 내어주기를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이 말씀은 내게 너무나 큰 고통이자 가시로 느껴진다. 교회를 공동체로, 또 가족으로 여기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향한 기대감과 일치되어 마음 속에서 하나의 다짐이 된다. 그러나 나의 혈연 가족들을 향한 책임과 돌봄의 말씀은 내게 괴로움이자 회피하고 싶은 말씀이다. 어릴 적부터 가족들을 향한 분노와 절망, 상처로 관계의 벽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알콜 중독과 폭언, 폭력, 과도한 기대와 요구, 무관심, 무책임 등으로 기억되는 나의 아버지를 나는 아직도 용서를 하지 못한다. 못하겠다. 머리와 마음이 분리되는 용서의 기로에서 나는 나의 작음과 못남에 무릎 꿇고 비통해한다. 나는 지금 아버지가 어디에서 사는지 모른다. 알려면 알 수 있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혼자서 생활을 할 수 없는 건강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까봐 두렵다. 그 땐,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돌보아야 하지만 내가 과연 돌볼 수 있을까. 매일 그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나는 상상 속에서조차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나의 신앙이 진실인지를 확인할 수 있게하는 문제가 될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 신앙을 알도록 준비해놓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나의 아버지를 도울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 나는 공동체 지체를 더 쉽게 품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는 이렇게 나의 부끄러운 삶의 조각을 잠시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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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rapeVine.Kim

170521

 최근 뜻하지 않게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는 중에 있다. 건강을 회복하는 와중에 건강에 무리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공동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레스토랑에서 함께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다른 일을 찾아볼까도 생각했지만, 공동체가 사람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고, 새로운 사람들과 일하면서 받을 스트레스를 굳이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전이었다. 그날 저녁은 매장 전체를 대여하기로 한 단체 예약 손님이 방문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매장이었기에 한꺼번에 여러 손님들이 몰려들 것이 부담스러웠다. 한꺼번에 다양한 요구가 쏟아질 것이 예상되었던 까닭이다. 출근을 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손님들이 방문했다. 정신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단체 손님들이 요청하여 마련한 열 댓 명이 앉을 수 있는 합석 테이블의 가운데 앉은 손님이 문제였다. 손님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듣기로는 그 분이 그날 저녁 자리의 주최자 격이었던 것 같았다. “저는 이 메뉴를 주문한 적이 없어요.” 그는 자신이 주문한 메뉴가 잘 못 나왔다고 컴플레인을 걸었다. 당시 그의 메뉴는 나와 매장의 홀 매니저격인 친구가 함께 주문을 받았기에 실수하기 어려웠었으나, 손님이 아니라고 하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과를 드리자, 그는 나에게 공식적으로 제공되지 않는 소스를 주기를 요청했다. 주방에 확인하자 어렵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손님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답을 드렸으나 그는 그런 요구하나 들어주지 못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나는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전하고 주방에 문의하여 손님이 원하는 음식으로 다시 준비해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의 컵에 얼룩이 묻었다거나, 다른 사람의 음식이 너무 늦게 나온다는 등의 의사를 표시했다. 가뜩이나 한꺼번에 다양한 요청이 들어와 신경이 곤두서고 피곤해져 있었다. 점점 그 손님에게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어이 마감시간이 다가왔다. 한번에 어질러진 매장을 한번에 치우는 일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이것 저것 치우다 보니 손님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계속 컴플레인을 걸던 손님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너무 잘 해주셔 감사하다고, 앞으로 자주 오겠다는 뜻밖에 말을 전했다. 나는 즉각적으로 감사하다고 인사말을 전했으나, 속으로는 당혹감이 들었다. 손님이 나가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손님에게 반감을 가지고 대응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손님은 매장을 나가면서 감사했다는 인사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찾아온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그리고 편히 쉬기 위해 매장에 방문한다. 방문자는 다양한 요청을 할 수 있고, 우리가 그 요청에 마음을 다하여 응답해주면 그 날 저녁처럼 감동을 받는 사람도 생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금 일을 하고 있는지 와는 별도로, 나는 지금 어찌되었든 공동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고 있다. 서비스업에 종사 중인 것이다. 나의 진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크던 작던 누군가를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 것 같다. 그 날의 기억을 기록하며, 당분간은 마음을 고쳐먹고 최선을 다해볼 것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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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rapeVine.Kim

170518 묵상노트

디모데전서 1:1~11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 된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쓸데없는 토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건전한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선포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처럼 변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이 위와 같은 문장으로도 명쾌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하는가. 안타깝게도 사랑하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들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우리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수단에 대해 서로 논쟁하며 왈가왈부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사랑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와중에, 서로 다른 방법을 발견한 나머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때론 자신만의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다가 싸움이 발생하기도 한다. 바울은 이 것을 두고 쓸데없는 변론이라고 일갈한다. 사랑하고자 미워하는 꼴이다. 목적전치다.

그러나 나는 서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논쟁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사랑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갈지 논쟁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우리의 삶은 구체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삶의 형태가 다양하듯, 답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답을 찾는 방법 조차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현대 개신교는 율법주의를 매우 부정적으로 여긴다. 그런 와중에도 고정되고 정형화된 신앙의 모습을 만들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앞에서 비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라는 거야? 신앙이 아니라는 거야?”, “믿음으로 인한 신앙이라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며 나는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려는 시도로부터 숨었던 것 같다. “정해진 방법은 없어라고 이야기함은 곧 내 행동의 옳고 그름, 혹은 정당과 부당함을 판단할 기준을 없애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내 행동에 대해 무엇으로 사랑인가 아닌가를 고민할 것인가. 나는 이미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음을 내 양심은 안다.

 나는 말씀 앞에서 내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해,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고 있는지 하지 않는지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타인에 대해 비난하고 타인을 구분 짓는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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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17 묵상노트

갈라디아서 6:11-18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습니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우리는 때때로 예수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구원의 증거를 삼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과 지키지 않는 것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하는데, 2000년이 지난 우리의 시대에도 율법주의자와 같이 행동하며 율법을 지키기를 강요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주의자만을 경계하면 되는 것일까? 바울은 율법주의만을 경계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즉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울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바울이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말 그대로 예수가 아닌 모든 것은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말씀을 보면서 나는 종종 예수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로부터 구원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내가 잘 살고 있음을, 내가 의미 있는 길을 걷고 있음을 확신하게 하고, 내 영혼이 평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 무엇이지 않을까. 세상이 우리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끼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돈과 명예, 안정된 직장, 건강 등이 있다. 나는 돈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았을까. 명예를 쫓고자 하지 않았을가.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하여 두려워하지는 않았는가. 건강을 잃어버릴까봐 불안하지는 않았는가. 마치 그것이 내게 구원이 되듯, 그것을 바라고 원하는 마음 속 깊은 곳의 열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보다 크지는 않았는가 생각해보면, 오직 예수만을 위해 세상을 버린 바울의 결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바울과 같이 되기에는 아직 너무 부족한 나이지만, 내게 없는 세상의 부와 명예로 인하여 불행함을 느끼려고 하기보다,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구원받음의 기쁨을 품고 살아가는 내가 되어보기를, 그래서 바울이 말한 평화와 자비로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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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rapeVine.Kim

170511 묵상노트

갈라디아서 4:8~20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시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주었습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떠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을만하던가, 용서 받을만하던가 해서가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셨던 것으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나의 구원의 문제에 해당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타인을 바라보면서도 적용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나는 자격 없지만 그분으로 인하여 자격을 얻고 용서를 받았다. 그리고 불완전한 공동체의 형제 자매 또한 자격 없음에도 용서 받았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 공동체 안에서 관계로 어려움이 느껴질 때가 많고, 때로는 그들의 부족함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의 어떠함이 그 또는 그녀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이다. 우리 모두는 자격 없음에도 이미 한 몸이 되었고,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자들이 되었다. 이 사실을 기억함으로 누군가를 대함에 있어서 조금 더 따뜻하고 포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물론 스스로를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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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rapeVine.Kim



2017년에 들어와서 청년부 리더 모임에서 ‘사람’이라는 서적을 가지고 나눔을 하고 있다. ‘사람’은 밥과 똥의 상관관계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밥과 똥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불경스러운 이야기로 치부될 정도로 우리에게는 터부시되는 것이다. 책에서는 밥은 어디까지가 밥이고, 어디서부터 똥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는 구분이 당연하고 어려울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만 생각을 더하자 대답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내장 기관은 하나로 이어져있기 때문이요, 똥이 거름이 되어 우리가 먹는 밥이 되고, 밥은 우리 몸 밖으로 나와 똥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밥과 똥에 대해 집요하게 고찰하던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삶은 어디까지가 삶이고 죽음은 어디부터 죽음인가.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지 무슨 말을 하느냐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자는 삶과 죽음을 따로 때어 생각하는 것은 결국 죽어야 하는 숙명으로 인한 삶의 비관이나 죽음으로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는 삶의 기만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밥과 똥의 문제처럼 살아가고 있는 순간은 죽어가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죽어가고 있는 지금은 살아가고 있는 순간이다. 처음부터 삶과 죽음은(밥과 똥은) 따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일상 속에서 의미 있게 죽는 것은 의미 있는 삶으로 이어진다.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아등바등 삶을 갈구하는 것은 온전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된다.


의미 있는 죽음이란 무엇이고, 온전한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에너지의 흐름’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죽는다는 것을 내가 가진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산다는 것을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에너지의 나감과 들어옴이 하나인 삶과 죽음을 설명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요즈음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꽤 오랜 기간을 집 안에서만 생활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란 밥을 먹고, 놀이 거리를 찾고, 누워서 쉬는 것이 전부다. 나는 내 에너지를 계속 축적만 하고 있다. 누군가는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문득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다. 삶이 끝나고 내 삶은 의미 있는 삶이었다고 평가 받을 수 있을까? 나의 삶은 내게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일생은 누군가로부터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다. 삶이 누군가로부터 기억되기 위해서는 생애 속에서 누군가에게 나의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어야 한다. 그 과정은 내 에너지의 소모를 뜻하고,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죽음(누군가를 위한 에너지의 소모) 없는 삶(자신 만을 위한 에너지 축적)은 온전한 삶이라 부르기 어렵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에너지를 어디에 쓰고 어떻게 죽어가야할까 고민해본다. 건강이 어서 회복되어 마음껏 죽을 수(타인에게 나의 에너지를 줄 수)있게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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