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아가는 나날, 기록

150124

by GrapeVine.Kim 2015. 1. 24.


오랜만에 무언가 끄적일려니 손이 어색하고 머리가 어색하다. 항상 적고 싶었으나, 무엇을 적어야 할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손을 움직이려고 시도했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은 내게 나오는 것은 잘 없었다. 글 쓰기에 대한 마음은 커지고, 놓지 못하는데, 정작 시도는 하지 않으니 후회할 것 같은 두려움만 가득 쌓였다. 그래서 마음의 부담도 커지게 되고 나는 더 쓰기가 어려워진다.


본디 나의 쓰기는 지적인 쓰기가 아니었다. 마음의 표현이었을 뿐이다. 마음. 우리가 사는 세상 외부에는 작은 나를 넘어서 무한한 세계가 있다. 알아야 하는 것은 많고, 적을 것도 많다. 그러나 반대로 작은 인간의 안에는 역설적이게도 또 하나의 무한한 우주가 있다. 그 우주 안에서 눈물도, 희망도, 사랑도, 좌절도 셀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감정이나 생각이 수평적이라면, 살아온 나날의 순간들이 수직적으로 있다. 살아온 나날. 오늘과 어제, 어제와 그제. 그리고 그 이전까지. 단순한 계산만으로도 살아갈 수록 늘어나는 시간이지만, 어제와 오늘이라는 시간 사이에는 나눌 때마다 새로운 '순간'이 있다. 때문에 이것 또한 셀수 없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무한한 우주가 되어 알아낼 수록 신비하다고 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을 찾아가기 위해 시작했던 쓰기. 때문에 그저 쓰여진 것만으로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있지 않을 수 있는 것들임을 알지만 나는 좋았다. 나는 나를 더 알고 싶었다. 


그러나 왠지, 쓰기를 멈추었다. 참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변화도 많고, 아픔도 많고, 괴로움도 많았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이해하는 길을 조금 놓쳐버린 듯 했다. 길을 헤매는 나는 앞으로 나가기도 또한 벅찼던 것 같다. 


살다 보니 나는 나를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했다. 잘 할 수 있을까? 나를 확실히 찾지 못한 내가 그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임지고, 지키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다시, 쓰기를 시작해야할 때가 아닐까 하고 마음을 먹어본다.





새벽녘, 사르르 밀려오는 통증에 눈을 떴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 뿐이었는데, 목이 아파왔다. 그렇게 아침 잠이 많은 내가 새벽녘에 눈을 뜰 정도의 통증이라니. 지금도 목 둘레가 시큰한게 영 불편한게 아니다. 아마 담이 왔나보다. 생각해보니 근래에는 계속해서 잠을 뒤척였다. 얼마전 구입한 라이프 트랙킹 기계의 수치에도 하루 수면 시간 중 숙면 시간은 3분의 1이 채 되지 않았다. 나머지 시간은 계속 뒤척이며 얕은 잠을 잤다고 표시가 되어있었다. 수면 시간의 수치도 수치지만, 잠을 깨기도 하고, 영 찜찜한 마음이 어딘가 있었던 것 같다. 정서에 예민한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음 편히 잠을 못자는 성격이었다. 무엇이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있었을까. 번잡한 마음은 어디서 올라온 것일까.


요즘 가게 일이 잘 되지 않는다. 겨울철이라 그런지, 국내 경제 상황이 계속해서 악화되는지,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졌는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운영을 잘 못하는지. 실상은 잘 모르겠으나, 매출이 뚝. 매장 뿐만이 아니라 납품하는 고객사에서도 실적이 떨어져 납품량이 같이 떨어지고 있다. 경민이 형은 한동안 버티어야 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급여 문제로 쓴 마음을 토로했었고, 힘든 사정을 알고 있는 나로써도 쓴 마음을 토로하는 내가 또한 탐탁치 않았다. 


가은이와 이야기를 하던 중,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가 얼핏 나오게 되었다. 어디에도 보장된 것은 없었다. 그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난 잘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었다. 많은 것을 할 수는 없더라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되고 싶었다. 한편에서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초라해보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불안,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 대한 불안. 불안이 가득했다. 내일이, 다음달이, 내년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이대로도 좋은 것인가. 그런 질문들이 들려오는 듯 했다. 나중에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면, 물어보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대답은 아마 하지 않을 것이었다. 정해지지 않음으로 인한 불안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내 심리 저 밑에서 꿈틀대며 나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 부쩍 짜증이 잘 내곤 했던 것도 그 영향이리라.


불안은 내게 무엇일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어떤 상황을 찾고 있는 것일까. 꼬박 꼬박 월급을 받고, 할 일도 주어지고, 앞으로의 진로도 내다볼 수 있었던 사회복지사 시절,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가? 대학 졸업을 압두고 취업을 하려면 사회복지사 1급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기에 치뤘던 사회복지사 1급 시험에서 합격했을 때,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가? 군대에서 한 사회의 부조리함을 모두 경험한 것만 같은 괴로움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전역 직후,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가? 대학입학만을 위한줄 알았던 학창시절, 가고 싶었던 대학교 앞에 서서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가? 불안은 그냥 나의 삶이었다. 불안은 삶의 일부였다. 끝이 없는 불안. 그것은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이 해결되면 불안은 얼굴을 바꾼채 내 옆에 있었을 것이다. 불안은 그냥 그런 것이었다. 불아는 그렇게 나를 괴롭혀온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다. 왜?


내가 바랐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면 행복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정말 그랬을까. 


바울의 옥중 서신들을 보면, 바울은 담담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형제와 자매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는 갖혀있다. 그는 자유롭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삶이란 옥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을 뜻했다. 그런데도 그는 담담히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내게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이끄신다는 믿음. 지금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세상의 기준으로 삶이 평가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의 삶을 높일 것이라는 믿음. ‘나’와 ‘우리’는 공동체라는 믿음. 나를 내어줄 때, 다 또한 누군가의 내어줌 위에서 살아갈 것이란 믿음. 부족한 것을 채우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이라는 믿음.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삶이 가장 아름답다는 믿음. 하나님이 나와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는 믿음.


믿음 앞에서 내 불안은 제 자리를 가질 수 없었다. 그 믿음과 불안은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불안은 오히려 자기기만에 가까웠다. 혹은 내가 믿음이라는 자기기만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무엇이든지 상황은 분명했다.


조금 불안감을 느낄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나를 잘 다독여가야 한다. 계속되는 삶 속에서 그것이 믿음의 표현일 것 같다. 지금 이렇게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나날,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0213  (0) 2015.02.16
아둥 바둥.  (1) 2015.01.26
헤드폰을 선물받다. (MDR-XB450AP 리뷰)  (0) 2014.12.18
용납해야하는 이유  (0) 2014.12.17
다시 살림의 노래로  (0) 201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