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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나날, 기록

3,900원의 인성

by GrapeVine.Kim 2017. 8. 29.

3900원의 인성

 때는 맹추위의 계절, 작은 송곳들이 바람에 실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날라 와서 피부에 1mm씩 박히고, 흐르는 혈액의 온도로 피부에 빠알간 잔상만을 남기고 녹아버리는 때였다. 그날은 눈이 내렸다가 녹고, 녹은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렸다가 녹는 잔망스러운 날이었다. 이열치열 아니, 이냉치냉이라 했던가 우리 부부는 여름보다 겨울에 XX킨 라빈스 31에 더 잘 갔었다. 한 때는 아이스크림을 이틀에 한통씩 사먹었던 것 같다. 질척이는 눈을 조심스레 피해 베스킨 라빈스 XX의 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베스X X빈스 31입니다. 혹시...스피커 있나요? 죄송합니다. 손님. 지금은 스피커가 다 떨어졌습니다. 네...안녕히 계세요. 짤랑. 짤랑. 우리 부부는 평소에도 아이스크림을 잘 사다먹었지만 그날은 특별히 다른 목적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면 3,900원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주는 이벤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12월 31일, 즉 2016년의 마지막 날인 31일이었는데, 베스킨 라XX 31은 31일이 되면 평소보다 크게 할인율을 높였다. 어떤 매장에 가도 사람은 넘쳤고, 블루투스 스피커는 동이 나있었다. 걸어서 한번, 버스를 타고 한번, 다시 걸어서 한번, 두드리면 열린다는 문들은 열리긴 했는데 목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동 주변에서 꽤 큰 매장을 발견했고, 그 곳을 마지막으로 생각하자고 결의하며 찾아갔다. 역시 손님은 많았고, 아이, 어른, 연인, 할머니, 할아버지 할 것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생들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안녕하시냐는 인사말에서 베어나왔다. 밖은 추웠고, 줄은 길었는데, 긴 줄을 기다렸다가 스피커를 받지 못하면 정말 짜증이 날 것 같다는 느낌이 위태로운 위기감을 자아냈다. 심호흡을 하며 줄을 서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내 앞으로 스윽-, 아이스크림에 헤어드라이기를 가져다 데면 스르륵- 녹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들어왔다. 딱 봐도 심상치 않고,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은 인상으로 인해...난 비겁하게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는 LED 등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너무나 강력한 LED 빛이 흡사 먹구름 속에서 한줄기 빛이 통과하는 것처럼 나에게 내려와 나를 불쌍하게 여겨주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 아주머니로 인하여 내 앞에서 물건이 끊기는 비극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커져갔다. 불안감은 그 아주머니를 향한 분노감으로 바뀌었고, 나는 아주머니를 내 큰 눈의 1/3만 연채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줄어들 때마다 느껴지는 그 긴장감은 슈팅게임을 할 때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비슷한 경험인 듯 싶었다. 드디어 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아르바이트 생은 뭐가 필요하냐고 풀린 눈으로 물어보았고, 나는 아이스크림과 스피커를 원한다고 간결하고 분명하게 표현했다. 아르바이트생은 한숨을 쉬기 위함인지, 물건을 꺼내기 위함인지 분간이 되지 않게 허리를 구부려 2초 정도를 머물다가 올라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드...드디어 들어왔다. 돌아다녀서 생긴 피로가 가시는 것 같은 시원함이 들었는데, 그것이 아이스크림의 냉기로 인함인지 스피커로 인함인지 잘 몰랐다. 물건을 받아 문을 열고 나오는데, 나의 앞에 끼어들었던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의 절반만을 뜬채 아주머니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면, 그 스피커는 꽤 좋았지만, 책상 한구석에 먼지를 쓰고 있을 뿐 잘 쓰지는 않는다. 나는 뭘 하려고 그렇게 돌아다닌걸까. 무엇 때문에 그녀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혼자 분해하고 열내고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성이 3,900원 짜리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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