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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이야기, 창작27

심호흡 (18.10.22) 문득 숨이 가빠진다. 떨쳐내려고 해도 떨쳐지지 않는, 화염이 폐를 가득 채운다. 사이에 숨어있던 산소가 발화하고 폐는 고무 풍선처럼 뻥하고 쪼그라든다. 후-하- 내쉬는 숨에 꽃이 타들어간다. 들이쉬는 숨에 내가 타들어간다. 물수건 하나를 이마에 얹어보지만 죽은 호흡을 살려줄 수는 없다. 불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불이 모든 것을 태우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냥 모래 한 줌 흩뿌려서 꺼보려하다가도. 불이 꺼지면, 추위가 오고 추위가 시작되면 꽃이 필 수 없다. 꽃 피기를 기다리는 아내에게 미안하여 나는 다시 불길을 잡는다. 다시 한번 심호흡. 조금 덜 뜨거운 불이 되기를. 조금 더 따뜻한 온기가 되기를. 다시 한번 심호흡. 2020. 2. 20.
동상(17.12.04) 동상 하늘을 향해 눕고 싶다. 벌거벗은 육체로 바람을 맞고 싶다. 무겁기만한 외투는 벗어버리고 가리워지지 않은 창공을 향해 벌거숭이의 숨결을 내쉬고 싶다. 푸석거리는 피부가 찢어질지라도 새어나오는 피가 마를지라도 어쩌면 비라도 떨어져주진 않을텐가 눈이라도 올라치면 세상의 종말을 볼 수 있지 않을텐가 무심한 눈동자는 바닥을 보고 바닥은 아직 단단하게 서 있다. 죽을 때까지 견고하리라 다짐한 것들도 죽기 전에는 문드러지고마는데 나는 그 전에, 하늘을 향해 눕고 싶다. 2020. 2. 20.
그대가 손을 뻗었을 때 그대가 손을 뻗었을 때 나 그대의 손을 붙들지 않으리라 마른 목에 건네는 생수 한병을 마시지 않으리라 나 칼을 들어 그대를 찌르노라 튀어오르는 피로 타는 목을 축이리라 그대의 사랑은 그림자가 되는 것이요 그대의 선행은 달콤함이니 나는 피로써 바다가 되리라. 2017. 9. 8.
​별 김용훈 초록 동빛이 내려오는 어스름 어둠이 무서운 전구 빛 위로 별들이 많이도 떳다. 멀리서 보면 까만 도화지 위에 하얀 점이라도 찍힌듯 누가 모래알이라도 흩어버렸는가. 참 개성도 없다. 사실 그들은 피부색도, 몸 무게도, 생김새도, 빠르기도, 위치도, 집 크기도, 친구도, 부모도, 자식도 모두 다르다. 가만히 점 하나 올려다 보고 있자니, 별 하나가 별 하나를 향해 돌진한다. 수줍은 별은 이끌리다가 격정적으로 하나가 되고 서로의 무게를 견디다 뜨거운 먼지가 된다. 별 하나는 인생이 무언지 고민하듯 같은 자리를 뱅 뱅 돌기만 하고 있다. 별 하나는 자신을 뜨겁게 태우고 있다. 절대영도의 고독 가운데 버려진 별들을 위한 초신성(超神聖). 관찰은 이해를, 이해는 판단을 낳는다. 그러나 수억 광년을 지나.. 2017. 6. 26.